정치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힘을 빌려서 자신은 까딱하지 않고도 적을 물리친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다. 그런데 방법이 좋지 않으면 자칫하다 욕을 바가지로 들어야 할 위험도 있다.

계략을 짜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겨야 온전한 승리가 된다. 고대의 군주들이나 전장의 장수들이 드러나지 않게 눈엣가시를 해치우는 방법으로 곧잘 썼다.

'병법 36계' 중 이와 같은 계책을 잘 설명한 것이 남의 칼을 빌려(借刀) 사람을 없애는(殺人) 제3계이다. 36계는 제1계인 瞞天過海(만천과해/ 하늘을 가리고 바다 건너기,  瞞은 속일 만)를 시작으로 제36계 走爲上(주위상)까지 모두 36가지 계책이 잘 설명되어있다.

안 될 때는 도망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줄행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제일 마지막인 최상의 것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知彼知己 百戰不殆(지피지기 백전불태/ 적을 알고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 殆는 거의 태)라는 말로 잘 알려진 孫子兵法(손자병법)과는 전혀 별개의 내용인데 같은 곳에 수록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병법 36계는 대개 5세기까지의 故事(고사)를 17세기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에 수집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한다.

이 성어는 수단으로 쓴 칼 사용자에게 누명을 씌우고 목적인 살인을 저질렀으므로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터에선 참으로 기묘한 계책이된다.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예가 많다.

曹操(조조)가 자신을 비난하던 예형을 황조를 시켜 없애버린 일이나 적벽대전 때는 도리어 吳(오)의 周瑜(주유)에 속아 수군을 훈련시키던 장수 蔡瑁(채모)와 張允(장윤)을 참수한 일, 劉備(유비)와 呂布(여포)의 관계 등은 모두 이 계책을 사용한 것이다.

이 방법이 일상에서 무분별한 허용은 안 되겠지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총선에 나갈 후보를 뽑는 공천에서 여야 함께 바로 이 방법을 쓴다. 쳐내고는 싶은데 실제로는 실력자가 못하고 관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탈락시키는 것이다.

새누리당에서 친박과 비박이 사생결단식 싸움을 벌이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친노와 문제 의원을 추린다. 그런데 합리적인 이유를 대지 못하거나 정교한 작업에 의하지 않아 잡음이 온통 당 밖으로 새어나온다. 나라를 들쑤시는 정치가들이 국민을 피곤하게하고 있어 한숨이 난무하다.

 

줄탁동기(啐啄同機)

요즘 충북의 교육계가 야단법석이다. 왜? 그렇게 싸우는지 줄탁동기(啐啄同機)가 그립다. 글자도 어렵고 뜻도 심오한 이 성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김종필 전총리가 신년휘호로 쓴 이후일 것이다.

한학에 밝은 김 전 총리가 정치적 고비마다 심경을 성어로 나타냈는데 이 말은 1997년 대선 정국에서 나왔다. 알에서 깨어 나오기 위해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껍질을 쪼는 것을 啐(줄)이라 하고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쪼는 것을 啄(탁)이라 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화가 안 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 말과 같이 깨달음에도 때가 있어서 적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친다.

啐(줄)은 맛볼잘과 떠들썩할 잘 등의 음도 있다. 줄여서 啐啄(줄탁)이라고도 하고 啐啄同時(줄탁동시), 啐啄之機(줄탁지기)도 같은 뜻이다.

중국 宋(송)나라 때에 편찬된 책으로 역대 선승들의 話頭(화두) 100개를 담아 禪宗(선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碧巖錄(벽암록)'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어려울 만하다.

雪峰(설봉) 스님을 이은 鏡淸(경청) 스님은 항상 후학들을 깨우칠 때 병아리의 啐(줄)과 어미닭의 啄(탁)을 강조했다. '무릇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줄탁동시의 안목을 갖추고 줄탁동시의 작용이 있어야 만이 비로소 승려라 일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마치 어미닭이 쪼려 하면 병아리도 쪼지 않을 수 없고, 병아리가 쪼려고 하면, 어미닭도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병아리는 수행자이고, 어미닭은 스승으로 비유하여 제자는 안에서 수양을 하고, 스승은 제자를 잘 보살피고 관찰하다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말이 어려운 선가의 지도법에만 국한될 리는 없다. 안팎이 동시에 손발이 맞아야 하는 것은 놓쳐서 안 되는 좋은 시기를 뜻하기도 하고, 이상적인 사제관계를 말하는데도 많이 쓰인다.

학교에서 제자를 이끌 때 스승은 항상 살펴가며 깨우칠 안목을 지녀야 하고, 받아들이는 쪽도 학업과 인격도약에 힘쓰며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교육이 훌륭하게 완성된다.

충북교육계에선 한 쪽만 아무리 열심히 알을 쪼아봐야 헛일이니 적기를 잘 아는 지혜를 발휘해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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