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

생가복원과 기념관건립 등 숙원사업 적극 추진할 계획

 [중원신문]이효진 기자= 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의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과 자유와 평등을 향한 끝없는 열정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류자명선생기념사업회]가 4월 19일 충청북도로부터 설립허가를 받고 5월 7일 법원에 법인설립 등기를 마침으로써 사단법인으로 새 출발을 한다.
 사업회의 회장은 류자명 선생의 손자인 류인호씨이며 자산 총액은 5천만 원이다.
 기념사업회 류인호 회장은 사단법일 설립을 계기로 시민사회와의 협력체제를 구축하여 류자명 선생의 선양사업과 중국과의 교류사업 등을 보다 활성화하고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 등의 숙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아울러 조직을 확대하고 체계화하여 시민과 함께 하는 단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애국지사 류자명 선생]
 
 
▲ 상해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활동
 
 중국으로 건너가 신한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상해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아나키즘을 학습하여 독립운동의 투쟁이론으로 수용하였다.
 1922년 봄 의열단에 가입하여 핵심참모로 활동하며 통신과 선전활동을 담당하였고 의열투쟁을 주도하였다, 1925년 3월 밀정 김달하의 처단을 주도하였으며 1930년 4월경 상해에서 아나스키트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1933년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저해하는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처단하기 위해 이강훈, 백정기, 원심창 선생 등과 육삼정의거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거사 직전 실행 요원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 2013년 중국 호남성 장사에 건립된 류자명 선생 흉상
 
 1937년 중일전쟁이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1938년 10월 우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조직되면서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여 10월 21일 충청도의원에 당선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1946년 3월 대만으로 건너가 타이완척식주식회사에서 농업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1950년 6월 24일 대만에서 홍콩으로 건너가 귀국하려 하였으나 6.25가 발발하면서 귀국이 좌절되었다. 류자명은 호남대학으로 부터 교수 초빙을 받고 호남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농예학부 주임과 원예학부 주임을 맡았다.
 호남농대 교수로 있으면서 포도, 장미, 쌀 등에 관한 연구로 농업분야에 관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중국인들로부터 존경받은 학자의 삶을 살아간 류자명선생은 1985년 4월 7일 조국을 그리워하며 머나먼 타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 2002년 3월 19일 대전현충원에 봉환된 류자명 선생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창사 웨루산 기슭 공동묘지 매장되었다가 2002년 3월 19일 대전현충원에 봉환되어 고국 땅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충주시, 기념관건립 약속 지켜야
 
  2006년 충주시가 중국에 있는 유족으로부터 유품을 기증받으면서 기념관 건립을 약속하였으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류자명 선생이 활동한 중국 호남성 장사에는 2013년 기념관과 흉상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충주3.1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외교청년단, 무력 투쟁단체인 의열단, 임시정부, 남화한인청년연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독립투사요 교육자인 류자명 선생의 선양사업에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당부했다.
저작권자 © 중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