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신문]  한국과 로마 카톨릭의 첫 만남은 불행했다. 임진왜란 침략 일본군 제 1장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였고 그를 비롯해 군단 병사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 신자들이었다.

 

 조선 침략군단 이름은 ‘그리스도단’(기리시단, 吉利支丹)이었다. 그 침략군단 앞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 칼라’를 한 로마 카톨릭교회 사제들이 뒤따랐다.

 일본에 진출한 천주교 선교사제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소속 사제들이었다. 예수회사제들은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백성사를 받아주었다.

 ‘성수’를 뿌리면서 조선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지구에서 사라졌을 뻔했다.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현재 카톨릭 수도회 중 가장 많은 신도와 사제수를 자랑하는 최대 분파다. 제수이트(Jesuit) 한자음을 따 '야소회(교)'로 불린다. 남미 출신으로 첫 카톨릭 수장이 된 교종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출신 최초 교황이다. 가톨릭 다이묘(大名) 출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그의 활동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주교 활동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일본 사사오산(笹尾山) 기슭 워 랜드(War Land)에는 임진왜란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의 조각상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전국(戰國)과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를 살았던 무장이다.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누스'인 크리스천(천주교) 다이묘(大名)다.

소서행장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 불릴 정도다.

 1584년에 영세를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영세명 아우구스티노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모두 천주교다. 아버지 세레명은 요나단, 어머니는 막달라, 대마도 성주 부인인 딸은 마리아였다.

 그가 거느린 장수도 대다수가 천주교인들이었다. 흑전장정(구로다 나가마다), 오도순현(고지마 쥰겐), 천초종원(아마쿠사 다네모토), 宗義智(소 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일본에서 천주교인을 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기리시단(吉利支丹)은 Christian의 포르투갈어를 일본어로 음역한 것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이 기리시단 부대가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제1군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조선의 해안정찰과 통상교섭을 위해 온 귀츨라프(Karl Gutzlaff)는 그의 항해기에서 이렇게 썼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장군들은 대개,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역시 천주교인이었다.”

 블린클리(F. Blinkely)는 부산에 상륙한 25만의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즉 기시시단이었다고 '대영백과사전 일본인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한 때 우키타가(宇喜多家) 밑에 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발탁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神秀吉)를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를 본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 신자이자 국제 약재상이었다.

 그는 1558년 국제무역항 사카이(堺)의 상인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차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오카야마 상인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우키타(宇喜多)의 집을 방문하면서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져 무사가 됐다. 히데요시(秀吉)로부터도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신하에 이르렀다.

 1565년 8월 초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부부가 히데요시를 찾았다. 히데요시는 시종이 내민 은(銀)으로 된 십자가와 검은 표시가 되어있는 나무 표찰을 보고 사카이에서 약재상을 하고 있는 고니시(小西) 부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엔 당시 상황이 나온다. "그 자는 고니시라고 하는 약재상 부부가 아니더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시절을 떠올리며 고니시 부부를 반갑게 맞았다. 부부 옆에는 열 살 정도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래 전에 부인이 했던 '오늘의 비겁함이 내일의 명장을 만든다'는 말을 연상하며 마음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부인께서는 글씨도 잘 쓰셨지만 조선이나 남만(南蠻: 스페인, 포르투갈)의 말을 잘하신다지요?" "네. 지금도 이 아이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모님의 소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난 고니시는 후일 그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히데요시(秀吉)의 신임을 얻어 1588년 히고노쿠니(肥後國) 우토성(宇土城)의 영주가 됐다.

 1549년 7월,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한 것은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 것은 새로 생긴 개신교가 새로운 나라나 대륙에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들어가 선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럽의 종교개혁이 한반도에는 천주교 침략으로 이어진 것이다. 남미 침략을 다룬 영화 <미션>의 조선판으로 생각하면 된다.

 일본에 조총(鳥銃)을 전수한 천주교 선교 성인 예수회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Francesco Xavier, 1506-1552)는 카톨릭 사제로 예수회 창립 멤버 6인 중 한 사람이다.

 천주교가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천주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였다.

 콘스탄틴이 바빌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해 만든 그리스도교인 로마 카톨릭(천주교)은 마틴 루터 같은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개혁교회 등장으로 인해 교황은 불안했고 종교재판으로 그리스도교를 뿌리 뽑아 없애려 하던 도미니크 수도회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사 지식에 해박하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뛰어난 전략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하해 세계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곧 종교개혁의 반동으로 ‘예수회(Jesuite)’를 개신교를 박멸하기 위해 창설했다. 로욜라는 천주교에선 <성 이냐시오>로 불린다. 그가 창립한 예수회 지부는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고 대항해를 하며 어디든지 진출했다.

 세계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리며 정치인들이나 상인들과 거래했다. 우리나라 서강대학교도 예수회 설립 대학이다. 임진왜란과 메이지 유신은 예수회 작품이다.

 천주교 강제 선교 목적으로 그들은 일본으로 항해했다. 1549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 바다에 도착해 일본 어린 영주에게 그들은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그 화승총을 그 후 계속 보급해 일본으로 하여금 정복적 야욕을 뜨게 하는 첫 계획에 착수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아시아 선교 첫발은 예수회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스페인 귀족 출신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였다. 그는 총포를 선물하며 인도와 일본 포교에 평생을 바쳐 천주교 포교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카톨릭의 성인 반열에 올랐다.

 조중화라는 임진왜란 전문가가 저술한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를 보면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사제는 일본 땅에 1549년에 정식적으로 포교를 시작한다. 그와 함께 온 유럽인들이 화승총을 계속 보급했다고 전한다.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예수회 사제였다. 그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소속 신부였다. 화승총을 조총으로 개량하고 삼단철포부대를 운영해 일본을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예수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대를 이은 히데요시가 임진대전쟁을 일으켰다. 이 대전쟁을 권유한 배후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를 같이 데리고 다니며 신부들과 함께 조선 땅을 짓밟으며 온갖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게 한 이 인물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소서행장으로 나온다.

 소오 요시도시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 고니시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천주교는 세계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중국 등지를 차지해 그곳에서 자본을 많이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사제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삭였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예수회가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시켜줄 것이다.”

그래서인지 히데요시는 인도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했다. 심지어 부채의 앞과 뒷면에다가 중국어와 조선어를 써서 달달 외웠다.

 임진왜란을 충동질한 예수회 위험성을 알아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모한 침략 전쟁이 끝난 이후 천주교인들을 일본에서 씨를 말려버리는 탄압을 하고 예수회를 추방시켰다.

예수회는 수백 년이 흐른 뒤 함포를 앞세운 미국 함선들을 끌고 와 일본을 협박해 개항시키고야 말았다.

 예수회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급속도로 일본 열도를 차지하고 일본을 부추겨 조선을 점령하게 해서 천주교인들이 거기에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일제 시대 천주교가 신사참배를 허용한 이유도 이와 관련있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원군이 예수회와 천주교인들을 목을 잘라가며 개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서는 대원군 때문에 조선의 개화가 늦어져 망했다고 대원군을 증오하게 만드는 역사교육을 시킨다. 한국 교육체계가 예수회 입맛에 맞게 교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인중 일부는 한국을 천주교 국가를 만들기 위해 당시 프랑스 군함으로 나라를 침공해주든지, 아니면 압박을 해달라는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것이 대원군의 무서운 박해를 초래한 단초였다. 천주교인들이 성인이나 위인으로 존경하는 김대건 신부나 알퐁소 신부 조차 예수회 소속임은 알려진 상식이다.

 예수회는 현재 한국에서 익히 알려진 존재이며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한론과 후일 일제시대가 여기서부터 열린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함께 1만 8000명의 병력(제1진)을 이끌고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단숨에 대동강까지 진격했고, 6월 15일 평양성을 함락했다.

 몇 차례의 밀고 당기는 전투 끝에 1593년 1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원군과 조선군에게 패해 평양성을 불 지르고 한양으로 퇴각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포로 중에서 세 살배기 한 여자 아이를 발견했고, 그 아이를 양녀(養女)로 길렀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 아이에게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명이 주어졌다.

 '오다(오타아) 줄리아-' 줄리아는 고니시의 어머니 즉, 양(養)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약재상을 하면서 '오늘의 비겁함이 내일의 명장을 만든다?'는 등 히데요시를 감동시킨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공문서를 대필해주던 여인이다. 줄리아는 할머니가 조선말을 구사 할 수 있었기에 교감이 더욱 잘 됐다.

 실제 줄리아는 할머니로부터 조선어와 일본어를 배웠고, 춤과 노래를 익혔다. 나라를 잃고 부모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는 전쟁 고아였으나 양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양 할머니는 신앙심이 깊었다. 줄리아는 할머니의 유언(遺言)을 가슴 속 깊이 새겼다.

 "얘야! 천주님의 사랑을 배워라. 항상 기도하면서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삶은 더 어려운 것이다.“

줄리아는 후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수청을 거부하고 절해고도 고즈시마(神津島)에 유배됐고, 거기에서 생을 마쳤다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어머니 가르침으로 신앙심이 깊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부대 깃발에 항상 십자가를 새겼다.

 일본 세키가하라 전투 진영을 모형으로 재현한 조형물에도 고니시 부대에는 십자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아무튼,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에 동조해 7천 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서군 주력부대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예상보다 빨리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동군의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이에야스는 무표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법대로 처리하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600년 11월16일(양력). 교토 6조 가와하라(六條河原)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할복(割腹)을 거부하다가 번뜩이는 칼날에 의해 목이 떨어졌다.

 그의 저승길을 동행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 1539-1600)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가 열렸다.

 여기에서 세스페데스(Grogorio de Cespedes, 1551-1611) 신부 이야기를 덧붙여본다. 그는 1551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1577년 천주교 불모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종군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그가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 신부 1호다. 그는 왜병들에게 잔학한 행위를 못하게 하고 조선 고아들을 돌보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에서 끌려간 전쟁포로들 중 노예로 팔려가는 2천여 명을 구출해 가톨릭 신자로 만들었다.

 가톨릭 박해가 가장 심했던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시대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스페데스 신부는 목숨을 걸고 선교 활동을 하다가 1611년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런 기록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T,s 역사서적에도 나온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여러 번 만날 정도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프로이스는 30년 가까이 일본에 체재하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 들었던 갖가지 사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일본사(Historia de Japam)’다.

 이 책은 진주박물관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국립진주박물관). 프로이스(Luis Frois) ‘일본사’ 결말부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일본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도 있습니다...약(略)...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 분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약(略)...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적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가장 기쁜 소식을 이제 머지않아 접하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1598년 10월 3일 나가사키에서...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이처럼 임진왜란은 사실상 천주교 십자군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저작권자 © 중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