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종호 민주평통충주시회장
“강력한 안보의 뒷받침이 없는 나라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일 뿐이다!” 거제도는 흥남부두를 떠난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함경남도 흥남항. 공산당치하 탈출을 위해 피난민 수만 명이 모여들었지만, 마지막 배인 '빅토리호'의 승선 인원은 2천 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몰려든 피난민들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엔군은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 1만4천 명을 배에 태웠고, 이렇게 피난민 10만 여명은 무사히 거제도로 탈출 할 수 있었다. 그 후 65년... 피난하는 배 안에서 핏덩이 채로 태어난 다섯 아이는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됐으며, 이들은 자신들을 있게 해준 이 거대한 구출작전의 의미를 지금 세대들에게 알리고 있다. "지금 우리 둘의 소명은 옛날 흥남철수 작전을 알려야겠다, 그런 차원에서 둘의 마음은 똑같고..." 라며 말을 잊었다. 세계기록에도 유래가 없는 생사의 기로에 선 민간인 10만 여명을 구출한 흥남철수작전. 65년 세월을 뛰어 넘어 생명 존중과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10만 명을 탈출시키며 인도주의의 상징이 된 '흥남철수작전'이 올해로 65주년을 맞았다. 이 기적의 구출 작전을 기리기 위한 행사에, 특별한 이들이 함께 했다. 지난 5월28일, 경남 거제도 신현읍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여기저기에서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1950년 12월 혹한의 흥남부두를 빽빽하게 메우고 서 있던 주인공들로, 자신들을 사지에서 구해 준 은인들을 기리기 위해 거제도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 당시 흥남부두로 이들은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배를 향해 수만 명의 피란민들이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면서 걸어갔다고 말했다. 5월28일 거제도에서 열린 ‘제10회 흥남철수 기념행사'에 처음으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참석해 기념비에 헌화와 함께 묵념을 올려 많은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날 리퍼트 대사는 축사를 통해 "아름다운 거제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뜻 깊은 자리에 참석해 기쁘다"며 "흥남 철수 작전은 미군과 한국인들이 협력해 이뤄낸 기적같은 일로 이를 통해 무려 10만명이 목숨을 구했다. 흥남 철수에서 보여준 미국과 한국의 협력 관계가 지금도 이어져 양국이 건전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흥남철수피난민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 ‘’흥남피난민철수작전은 기적이다!‘ 다시는 이 한반도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며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맥아더 장군, 라루 선장 등 흥남철수 작전의 역군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미군 관계자들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 당시 흥남부두에서 金白一 장군은 몰려드는 북한피난민을 보면서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다”고 말했다. 1950년 12월 흥남으로 철수한 金白一 장군은 1군단사령부에서 피란민 수송대책을 열고, 수도사단장 宋堯讚(송요찬) 준장과 군단 민사처장 柳原植(유원식) 중령 등 참모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편이 났다. 어차피 북괴놈들에게 당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라고 말했듯이 그들이 왜.. 목숨을 걸고 공산치하에서 벗어나려 했겠는가.. 그것은 자유의 대한 동경과 실상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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