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영상(건국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엊그제까지 연말 마감과 여러 모임의 송년회가 있어 조금 피곤하고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어느새 새해가 왔다. 며칠 전 새해는 벌써 올해가 되었고 365번의 오늘이 지나면 또다시 내년이 올해가 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이야기 하지만, 하나의 연속된 흐름일 뿐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미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으며, 다만, 어제의 모습으로 오늘을 이해하고, 오늘의 결과로 내일을 예측할 뿐이다. 그리고 지난 일을 후회해야 소용이 없고, 내일을 걱정해도 도움이 안 된다. 그저 성실한 오늘을 쌓아서 내일을 기대할 뿐이다. 이러한 사람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국가도 세월을 겪는다. 지역의 오늘은 과거의 결과이며, 역사의 반추이다. 따라서 어제의 거울에 비추어 내일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삼국시대 충주는 국원경, 중원경으로 불리며 2소경 가운데 하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5소경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전국 8도 중 하나인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도시였다. 인구 규모면에서도 조선 영조 35년에는 107,693명으로 172,166명인 서울 다음으로 큰 지역이었으며, 정조 13년에도 평양, 의주에 이어 4대 도시에 포함되었다. 이와 같이 충주의 위상은 조선시대까지도 국가의 주요 도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반란과 부도덕한 사건에 연루되어 몇 차례 충청도가 공청도로, 충주목이 유신현 또는 충원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충청도와 충주목으로 복원되곤 하였다. 충주지역이 역사상 국가 주요도시의 지위를 유지해 왔던 것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고, 국토를 종단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삼국시대에는 전란의 격전장이기도 했고,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승전지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때는 8천여 군민이 함께 전사한 가슴 아픈 역사를 겪기도 했다. 이렇듯 우여곡절 속에서도 국가의 주요 도시로서 자부해 왔던 충주가 오랜 세월 정체되어 온 이유는 일제의 경부선철도 건설과 함께 국가의 중심축에서 멀어졌고, 도청마저 청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충주 지역 스스로 이러한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악화되는 외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지역 시스템 내부의 역동성과 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016년 새해 아침, 충주지역의 해맞이는 짙은 안개 속에서 이루어졌다. 충주호의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태양은 분명히 떠올랐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뜨지 않고 세월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눈에 보이는 미래가 누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희망을 가진 자와 아닌 자의 차이 때문이다. 희망으로 지역의 미래를 보는 자나 지역의 내일을 창조하려는 자는 그 미래를 향해 준비해야 한다.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과 노력이 지역의 내일을 예시한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 그리고 세계와 한반도라는 공간 속에서 충주의 위치와 역할을 찾아내야 하고, 충주라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나서서 바른 방향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올바른 방향을 찾고 성실하게 오늘을 사는 것만이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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